안녕하세요 치다입니다! 오늘은 저번 포스팅(문종)에 이어 단종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 )
조선 제6대 왕(재위 1452∼1455).
1441년 8월 9일 단종은 당시 왕세자였던 문종과 왕세자빈이었던 현덕왕후의 외아들로 태어났으나 몸이 약한 현덕왕후가 단종을 낳은 지 하루 만에 산고로 인하여 세상을 떠났다. 현덕왕후가 죽자 어린 세손을 가련히 여긴 세종은 소헌왕후와 의논하여 자신의 후궁인 혜빈 양씨에게 어린 단종을 부탁했고, 세종의 후궁이자 조모 뻘인 혜빈 양씨의 보살핌 아래에서 성장하였다. 단종은 할아버지 세종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 하지만 병중이었던 세종은 자신이 그리 오래 살지 못할 것을 예감하고 있었으며, 병약한 아들 문종 역시 오래 살지는 못할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늘 어린 손자 단종을 몹시 걱정했다. 문종마저 요절하고 나면 야심으로 가득 찬 둘째 아들 수양대군을 비롯한 혈기왕성한 여러 대군 사이에서 어린 손자가 아무 탈 없이 잘 살아갈 수 있을지 걱정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생전에 황보인, 김종서, 성삼문, 박팽년, 신숙주 등에게 단종을 지켜줄 것을 부탁하였다. 단종은 1448년 8살이 되던 해에 왕세손으로 책봉되고, 1450년 할아버지 세종대왕이 죽고 아버지 문종이 왕으로 즉위하자 바로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앞서 언급하였듯 문종이 즉위하기 전 할아버지인 세종은 세자 문종의 병약함과 수양대군, 안평대군 등의 아들들의 존재를 염려하여 집현전의 학자들에게 어린 손자를 부탁하는 말을 여러 번 반복하였다. 성삼문 등 세종의 뜻을 받들었던 신하도 있었지만 신숙주와 같은 일부 신하들처럼 수양대군의 측근이 된 신하들도 있었다. 1452년 4월 야심이 많은 수양대군은 관습도감 도제조에 임명되었으나 야심을 철저히 숨기고 불사 중창과 법회의 참석하는 등 자신의 뜻을 철저히 감추었다. 그가 관습도감 도제조가 되자 사간원에서 종친에게 실직을 주는 것이 옳지 않다고 탄핵했으나 문종은 이를 듣지 않았으며, 세종이 우려했던 대로 문종은 즉위한 지 겨우 2년 3개월 만에 병으로 승하하고 말았다.
< 너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다 >
1452년 단종은 문종의 뒤를 이어 12살에 왕위에 올랐다. 단종은 어릴 때부터 세종의 칭찬이 자자했을 만큼 영리하였지만, 너무나도 이른 나이에 왕위에 오름으로 인해 혼자서 나랏일을 결정할 수가 없었고 모든 결정은 의정부의 신하들이 도맡아 했으며, 단종은 형식적인 결재를 하는 데 그쳤다. 특히 인사 문제는 고명대신들에 의한 '황표정사'(세 명의 후보자 중 한 명의 이름 위에 대신들이 황표를 붙여 올리면 임금이 황표가 붙어있는 해당자를 그대로 낙점했던 인사관행)라는 방식으로 결정되었으며, 어린 단종의 즉위 이래 정국이 불안해진 가운데 위축된 왕권과 달리 수양대군 등 종친의 세력은 나날이 팽창되어 갔다. 수양대군은 종친의 대표로서 자신이 단종을 최측근에서 모실 수 있는 보호자라고 말하였고 비밀리에 측근 세력을 양성하여 왕위를 찬탈할 기회를 호시탐탐 엿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안평대군 계열이 먼저 손을 쓰려는 움직임이 감지되자 1453년에 계유정난을 일으켰는데, 이때 그는 지나치게 비대해진 신권을 억압한다는 명분으로 조선의 왕족과 성리학자들의 지지를 획득한다. 이후 수양대군은 장악원 제조 등을 역임하며 권력 기반을 다지게 된다. 1453년 10월 수양대군은 한명회, 권람 등과 공모하여 문종의 고명을 받아 단종을 보필하던 황보인, 김종서, 정분 등을 죽이고 10월 10일 자신의 아우 안평대군을 강화도에 유배시켜 스스로 영의정부사가 되어 정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이어 1454년 3월 논공행상을 정하여 정난공신을 책정하였다.
< 비극적인 결말 >
계유정난으로 인하여 수양대군이 실권을 완전히 장악하자 단종은 단지 이름뿐인 왕이 되고 말았다. 1454년에 수양대군이 금성대군을 비롯한 단종의 나머지 측근들을 모두 죄인으로 몰아 유배하는 일이 일어나자 계유정난을 계기로 일부 신료들은 단종이 양위해야 된다는 공론을 세웠고 이는 통과되었다. 1455년 단종은 수양대군의 측근 세력인 한명회, 권람 등에게 선위를 강요받아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나 수강궁으로 옮겨졌다. 동시에 그의 유모이기도 했던 혜빈 양 씨는 금성대군 등과 결탁하여 전횡을 휘둘렀다는 이유로 탄핵당하고 청풍으로 유배를 갔다가 1455년 12월 17일 신하들의 여러 상소 끝에 교수형으로 사망한다. 1456년 음력 6월에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김문기, 유성원 등 이른바 사육신이 단종의 복위를 꾀하려다 발각되어 처형 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 바람에 1457년 단종은 그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노산군, 즉 폐주로 강등되어 영월로 유배되었다. 1457년 9월 금성대군은 배소인 순흥에서 단종 복위 계획을 세웠으며, 금성대군, 순흥부사 이보흠 등이 또다시 단종 복위 사건을 일으키자 세조는 금성대군을 사사하고 단종도 같이 죽음을 내렸다. <세조실록>에는 단종이 17살의 어린 나이로 자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숙종실록>에는 의금부 도사 왕방연이 단종을 찾아가 차마 아무 말도 못 하자, 그를 모시고 있던 자가 그를 해하였다고 한다. 단종이 죽자 아무도 그의 시신을 매장하지 못하였으나, 영월군의 호장인 엄흥도가 그의 시신을 수습하여 매장지를 찾던 중, 눈보라가 치던 곳에서 사슴이 앉았다가 사라진 곳을 보고, 그곳에 가매장했으며 단종을 매장한 뒤 엄흥도는 가솔들을 이끌고 영월을 떠났다. 공적으로는 단종의 추모가 금기시되었지만 사망 직후 정보, 이수형 등은 복상하고 3년상을 치루기도 했으며 사후 무속에서 신으로 숭배되기 시작했다. 단종은 죽은 뒤 묘호도 없이 노산군으로 불리다가, 중종 때 사림에 의해 복권 논의가 나왔으나 거절당하였다. 그 후 사망한 지 241년 만인, 1698년에 복위되어 묘호를 단종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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