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조선의 3대 왕 '태종' 그는 누구인가? 이전 글
안녕하세요! 치다입니다. 오늘은 조선의 4대 왕!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존경하는 임금 중 한 명인 세종 입니다!
조선왕조 제4대 왕(재위 1418~1450).
세종 이도는 1397년 음력 4월 10일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칠남으로 태어났다. 처음 그의 이름은 이막동으로 지어졌다가 후에 이름을 이도로 고쳤는데 1400년 아버지 이방원이 왕세자가 되면서 그는 잠정적 왕위계승권자의 한 사람이 되었으며 1408년 열두 살이 되던 해에 충녕군에 봉해졌다.
세종은 어려서부터 독서와 공부를 좋아했다. 책을 한시도 손에서 놓지 않아 눈병과 과로로 건강을 많이 해치기까지 할 정도였는데 어린 시절 하루는 눈병이 났음에도 책 읽는 것을 멈추지 않아 태종이 강제로 책을 빼앗기도 했지만 우연히 병풍 틈에서 발견한 '구소수간'을 기뻐하며 닳도록 읽을정도로 독서 중독자 였다고 한다. 이때 세종은 태종이 모든 책을 돌려줄 때까지 '구소수간' 한 권을 무려 1000번 정도 읽었다고 한다. 또한 어린 시절 세종은 형제간의 우애도 깊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특히 동생이며 태종의 넷째 아들인 병약한 성녕대군에게는 자신이 병간호를 할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홍역을 앓던 성녕대군은 끝끝내 병을 이기지 못한 채 1418년 14세의 나이로 일찍 죽고 만다.
1412년 세종은 16세에 둘째 형 효령대군과 함께 대군으로 진봉 되어 충녕대군이 된다. 그는 형제간의 우애가 깊기도 했으나 라이벌 의식 또한 만만치 않았는데 실록에는 다음과 같은 그의 도발적 행동도 기록되어 있다. 세종은 충녕대군 시절 "임금의 아들이라면 누군들 임금이 되지 못하겠습니까?"라는 한 신하의 위험한 발언을 아버지인 태종에게 전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도 하였고 궁에서 잘 적응하지 못하는 형님이자 세자인 이제(양녕대군)에게 "마음을 바로잡은 뒤에 몸을 꾸미라"라며 충고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결국 궁 생활을 적응하지 못한 양녕을 본 태종이 신하들과의 회의에서 "세자의 행동이 지극히 무도하여 종사를 이어받을 수 없다고 대소 신료가 청하였기 때문에 이미 폐 하였다."라고 하며 양녕대군을 왕세자에서 폐위하였다. 양녕이 왕세자에서 폐위가 되자 효령대군은 세자 자리를 기대하였으나 양녕은 충녕대군에게 세자 자리가 갈 것이니 포기하라고 하였다. 결국 태종은 황희와 같은 일부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22살의 충녕대군을 새로운 왕세자로 책봉하였고, 세자였던 이제를 양녕대군으로 강봉하였다. 얼마 후 태종은 왕위를 세자에게 물려주고 연화방의 옛 세자궁으로 거처를 옮겼고 마침내 세종은 1418년 8월 10일 조선의 제4대 임금으로 즉위한다.
세종은 신분을 가리지 않고 유능한 인재를 많이 등용하여 깨끗하고 참신한 정치를 펼쳐 나갔다. 그러면서도 인사와 군사에 관한 일은 세종 자신이 직접 처리함으로써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이루었다. 아울러 국가의 행사를 오례에 따라 유교식으로 거행하였으며 사대부에게도 주자가례(중국 송나라 주자가 가정에서 지켜야 할 예의범절에 관해 저술한 책책)의 시행을 장려하여 유교 윤리가 사회 윤리로 자리 잡게 만들었다. 또한 사대사고를 정비하고, <삼강행실도>,<효행록>등을 간행하여 유교를 장려하였다. 불교에 대해서 초년에는 억압 정책을 썼으나 말년에는 내불당을 지어 불교를 독신하고 승과를 설치하는 등 억압 정책을 완하 하였다. 세종은 명나라와의 외교에서 금, 은 세공을 말과 포로 대신토록 하는 데에 합의를 성공적으로 이끌었고 여진과의 관계에 있어서 최윤덕과 이천에게 압록강 상류지역에 4군을 김종서와 이징옥에게 두만강 하류지역에 6진을 설치하도록 하였다. 왜구 문제는 처음에는 회유책을 써서 평화적 해결을 모색했으나, 당시 일본국의 무로마치 막부의 전국 통제력도 완벽하지 않아 왜구의 남해안 노략질은 줄어들지 않았다. 1419년 왜구가 침입하자 이종무 장군을 삼도 도절제사로 삼아 그 로 하여금 삼도에 소속된 9명의 절제사들과 다수의 전함, 군사 1만 7천 명을 이끌고 거제도의 마산포를 떠나 왜구의 근거지인 대마도를 정벌케 하였다. 1420년 중앙 집권 체제를 운영하기 위해 정책 연구 기관으로 궁중 안에 집현전을 설치하여 그들을 일반 관리 이상으로 우대하였다. 1443년 조선에 고유 문자가 없음을 탄식한 세종은 신숙주, 성삼문, 박팽년, 정인지 등의 집현전 학사들에게 명하여 언어를 연구하게 된다. 이렇게 하여 탄생한 것이 바로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 '훈민정음'이다.
세종은 문치주의 정책을 펼치면서 건강이 나빠져 세 명의 정승에게 조정의 대소사를 맡아보게 하였다. 황희에게는 인사, 행정, 군사 권한을 맡겼고 맹사성에게는 교육과 제도 정비 윤회에게는 태종과의 중개자 역할과 외교 활동을 맡겼고 과거 시험은 맹사성과 윤회에게 분담하여 맡겼다. 나중에 김종서가 재상의 반열에 오를 때쯤에는 국방 업무는 김종서에게 맡겨서 보좌하게 하였다. 맹사성과 황희는 같은 입장을 취하면서도 서로 다른 성품을 가졌었다. 황희가 분명하고 강직했다면, 맹사성은 어질고 부드럽고 섬세했다. 또한 황희가 학자적 인물이었다면 맹사성은 예술가적 인물이었다. 윤회 역시 예술가적 특성을 갖고 있었다. 세종은 이들 재상들의 재질과 능력을 보고 적합한 임무를 분담하여 맡겼다. 황희는 주로 이조, 병조 등 과단성이 필요한 업무에 능했고, 예조 공조 등 유연성이 필요한 업무에 능했으며 윤회는 외교와 집현전 쪽을 주로 맡아보았다. 세종은 부드러움이 필요한 부분은 맹사성에게 맡기고, 정확성이 요구되는 부분은 황희에게 맡겼다. 따라서 황희는 변방의 안정을 위해 육진을 개척하고, 사군을 설치하는 데 관여, 지원하기도 했고 외교와 문물제도의 정비,
집현전을 중심으로 한 문물의 진흥 등을 지휘 감독하는 일을 맡기도 했다. 이에 반해서 맹사성은 음률에 정통해서 악공을 가르치거나, 시험 감독관이 되어 과거 응시자들의 문학적, 학문적 소양을 점검하는 일을 주로 맡았다. 맹사성과 비슷한 윤회에게는 주로 외교 업무와 태종과의 매개자 역할 외교 문서의 작성과 시험 감독관 등의 업무가 부여되었다. 이들 재상들은 맡은 분야와 업무를 서로 분장하거나 서로 공유하기도 하였다. 맡은 역할과 성격을 떠나 이들은 모두 공정하고 공과 사를 명확하게 구분한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세종대왕은 알려드리고 싶은 것이 많아 오늘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세종의 다음 이야기는 [下] 편에서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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