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조선의 4대 왕 '세종' 그는 누구인가? [上]
안녕하세요 치다입니다! 오늘은 '세종' 그는 누구인가? [下]편 입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 세종의 업적 >
세종은 정인지, 정초, 이천, 장영실 등에게 명하여 천문 관측기구인 간의, 혼천의, 혼상, 해시계인 앙부일구와 물시계인 자격루, 누호 등 백성들의 생활과 농업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는 과학 기구를 발명하게 하였다.
세종은 과학관의 일종이라 할 수 있는 흠경각을 세우고 과학 기구들을 설치했다. 고금의 천문도를 참작하여 새 천문도를
만들게 했으며, 이순지와 김담 등 주변국의 역법을 참고로 하여 역서 <칠정산내편>과<칠정산외편>을 편찬함으로써 독자적으로 역법을 계산할 수 있게 되었다. 태종 때 제작되었던 기존의 청동 활자인 게미자가 글자의 형태가 고르지 못하고 거칠다는 단점이 발견되자, 세종은 1420년에 경자자, 1434년 갑인자, 그리고 1436년 병진자 등을 주조함으로써 활판 인쇄술을 한 단께 발전시켰으며, 서적 편찬에도 힘썼다. 1431년과 1446년에는 아악의 음률을 정하는 기준으로 쓰던 구리관인 황종관을 표준기로 지정하여 그 길이를 자로 삼고 담기는 물을 무게의 단위로 삼도록 함으로써 조선의 도량형을 확립시켰다. 또한 천자총통, 지자화포와 같은 신무기를 개발하는 것은 물론 총통의 제작 및 사용법에 관한 책인<총통등록>을 편찬했다.
세종은 관습도감을 두어 박연으로 하여금 제례 때 사용하는 중국의 음악이었던 아악을 정리하여 향악과 조화롭게 결합시켰다.또한 새로운 음악에 맞춰 새로이 편경과 편종 등의 악기를 만들었으며, 정간보를 통해 이 음악을 기록하게 하였다.
세종 자신이 지은 <월인천강지곡>을 비롯하여 정인지, 권제의 <용비어천가> 정초, 변계 문의 <농사직설> 등 각 분야의 서적을 편찬하였다. 한편 농업과 양잠에 관한 서적의 간행, 환곡법의 철저한 실시, 조선통보의 주조, 전제상정소를 설치하고 공정한 전세제도의 확립 등으로 경제생활 향상에 전력했다. 세종은 즉위초부터 법전의 정비에 힘을 기울였다. 세종 4년에는 완벽한 <속육전>의 편찬을 목적으로 육전수찬색을 설치하고 법전의 수찬에 직접 참여하기도 하였다. 수찬색을 세종 8년 음력 12월에 완성된 <속육전>6 책과 <등록>1 책을 세종에게 바쳤고, 세종 15년에는 <신찬경제속육전>6권과 <등록>6권을 완성하였다. 그러나 그 뒤에도 수정을 계속하여 세종 17년에 이르러 일단 <속육전> 편찬사업이 완결되었다. 한편으로는 형벌제도를 정비하고 흠휼 정책도 시행하였다. 세종 21년에는 양옥, 온옥, 남옥, 여옥에 관한 구체적인 조옥도를 각 도에 반포하였고, 세종 30년에는 옥수들의 더위와 추위를 막아 주고, 위생을 유지하기 위한 법을 유시하기도 하였다. 세종은 형정에 신형, 흠휼 정책을 썼으나 절도범에 대하여는 자자, 단근형을 정하였고, 절도3범은 교형에 처하는 등 사회기강을 확립하기 위한 형벌을 강화하기도 하였다. 또, 공법을 제정함으로써 조선의 전세 제도 확립에도 업적을 남겼다. 종래의 세법이었던 답험 손실법은 관리의 부정으로 인하여 농민에게 주는 폐해가 막심하였기 때문에 세종 12년에 이 법을 전폐하고 1결당 10두를 징수한다는 시안을 내놓고 문무백관에서 촌민에 이르는 약 17만 명의 여론을 조사하였으나 결론을 얻지 못하였다. 세종 18년에 공법상정소를 설치하여 집현전 학자들도 이 연구에 참여하게 하는 등 연구와 시험을 거듭하여 세종 26년에 공법을 확정하였다. 이 공법의 내용은 전분육등법, 연분구등법, 결부법의 종합에 의한 것이며 조선시대 세법의 기본이 되었다. 세종은 복지정책에도 힘을 쏟았는데, 부모를 잃은 아이들이나 남편을 잃은 여자 등 약자들에게 담당 관사에서 쌀을 지급해주도록 했고 장애인과 노인에게는 세금을 면제해 주었을 뿐 아니라 장정을 한 명씩 내주어서 봉양을 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세종은 시각장애인 복지정책에도 신경을 많이 썼다. 그 예로 유명한 시각장애인 점복가(점술가)에게 벼슬을 준 일이 있다. 세종은 "점복가인 지화가 국가의 미래를 점치는 일과 왕실 혼인에 자주 참여하여 점술을 잘 치니 벼슬을 어떠냐"라고 황희와 맹사성에게 물었다. 황희가 정4품으로 한정하자고 제안하여 시각장애인 점복가인 지화와 이신에게 벼슬을 주었다. 그러자 사간원에서 반대한 것을 세종은 사옹원의 벼슬은 문제가 없다고 하였으며 이것이 정당하다고 신하들을 설득시킨 일이 있었다.
세종은 어린 시절부터 몸이 약한 데다가, 학문에만 전념하는 모습을 보여 아버지 태종에게 걱정을 샀던 세종은 젊은 시절 무리하게 국정을 돌본 탓에 집권 후반에 들어서면서 건강이 몹시 악화되었다. 각종 질병에 자주 시달려서 병석에 누워 정무를 볼 수 없게 되었고, 이러한 질병으로 인해 여러 번 세자의 섭정을 하려고 하였으나 신하들의 반대에 무산되었다. 하지만 세종의 병세가 계속해서 악화되어 제대로 집무를 할 수 없게 되자 결국 1442년부터 세자 향에게 섭정을 하도록 했다. <세종실록>을 보면 집권 후반부에는 이런 각종 질병을 다스리기 위하여 자주 온천에 행차하였음이 기록되었다. 하지만 의외로 매우 정력가였던 세종은 아이를 많이 낳을 정도로 후궁을 많이 두었다고 한다. 또한 세종은 대식가였고, 몸집이 비대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세종은 육식과 학문을 매우 좋아했으나 운동은 거의 하지 않았다고 한다. 세종은 운동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종기, 당뇨병, 풍질 등을 평생 동안 앓았다고 한다. 세종이 시각장애인이라는 견해도 있다. 세종실록 92권에 쓰인 내용을 보면 두 눈이 흐릿하고 아파서 봄부터 어두운 곳에서는 지팡이에 의지하지 않고는 걷기가 어려웠다. 등의 내용으로 세종이 시각 쪽에 장애가 있었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고, 재위 32년 중 약 20년 정도는 시각에 장애를 느꼈으며 승하하기 전 8년 동안은 거의 앞을 보지 못했다고 한다. 결국 많은 질병을 앓던 세종은 끝내 1450년 음력 2월 17일 당뇨병 합병증과 중풍 등의 후유증으로 인하여 54세를 일기로 영응대군의 사택인 동별궁에서 승하하였다.
자 세종에 대해 상, 하로 나누어 알아보았는데요 우리가 흔히 아는 훈민정음뿐 아니라 세종은 정말 민생의 복지와 과학기술의 발전에 많은 기여를 한 것 같습니다 : )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이상 세종 편은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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