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치다입니다. 오늘은 저번 포스팅(조선의 1대 왕)에 이어 2대 왕 '정종'에 대해 포스팅을 해보겠습니다!
조선 제2대 왕(재위: 1398~1400) 왕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경(曔)이고, 초명은 방과(芳果)이다. 자는 광원(光遠)이다. 태조의 둘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신의왕후 한씨(神懿王后 韓氏)이다.
그는 태조 이성계의 둘째 아들로 출생했다. 성품이 인자하고 용기와 지략이 뛰어나, 고려 때 아버지를 따라 북방의 전투에 참가하며 많은 전공을 세웠다. 기록에 의하면 체구가 곰처럼 강건하고 왼쪽 눈 밑에는 큰 사마귀가 있었다고 한다.
또 그는 아버지인 이성계의 무인적인 기질만큼은 형제들 중 가장 많이 물려받았다고 한다. 조선 개국 뒤 영안군에 임명되었다. 방과(정종)는 권력을 지향하는 기질은 아니었기에 태조 이후 왕자의 난으로 발생한 풍파를 겪지 않았다.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난 결과로 세자로 임명되었다. 역대 조선 국왕 중 최초로 한양(경복궁)에서 즉위한 왕이다. 또한 태조 이성계 다음으로 즉위할 때의 나이가 가장 많은 왕이기도 하다. 겨우 2년 남짓 재위했고 사후에는 정통성 문제로 왕 대접을 받지 못하였다. (사실 생전에도 왕 대접을 받지 못하여 허수아비 왕 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고려시대에는 명장 이성계의 아들답게 무장으로 활약했다. 만 20세가 되던 1377년 5월에 태조를 수행하여 지리산까지 노략질하기 위해 진출한 왜구를 치는데 동행하였으며, 황산 대첩에서도 태조의 곁에서 함께 싸웠다. 이후 위화도 회군 때 형 이방우와 함께 우왕 진영을 탈출해 신속하게 이성계 측에 합류했으며 1389년 해주에서 왜구를 무찌른 기록도 있다. 정종이 본래 아버지 이성계 휘하의 무장이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는 바가 있는데 정종은 단지 큰형
이방우 다음 서열이기 때문에 실질적 장남 대우를 받은 것이 아니었다. 물론 이방우가 장남이긴 했지만 그건 고려의 중앙귀족인 개경의 전주 이씨 가문의 차기 후계자로서 그러했던 것이고, 이방우가 개경에서 당주의 역할을 수행한다면 동북면의 영지와 가별초를 통솔할 사람이 따로 필요하게 될 것이었고 그래서 그 다음 서열인 정종이 무장이 되어 아버지 이성계로부터 직접 군인 수업을 받은 것이다. 즉 정종은 조선 건국 이전부터 동북면의 영주 및 가별초 총사령관 자리를 물려받을 이성계의 또 다른 후계자였고 그래서 문중에 미치는 영향력이 차남치고는 상당히 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조선왕조의 개국 논의가 한참 일어날 무렵엔 의외로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동생 이방원이 정몽주를 척살할 계획을 세울 때 같이 동참한 사람이다. 정몽주가 선지교에서 참살된 후, 곧바로 총대를 메고 공양왕에게 정몽주 살해를 알렸으며, 자신들을 처벌하든지 아니면 정몽주 계열 인사들을 처벌하라고 매섭게 압박했다. 이방과는 정몽주 세력이 제거된 직후 판밀 직사사의 직위를 받았다.
그는 아내 정안왕후 김씨와의 젊은 시절부터의 정 때문에 아내를 더 얻을 수 없다 하여 평생 해로한 애처가이기도 하다.
상왕으로 물러난 뒤 태종이 원경왕후 민씨와의 사이가 극도로 나빠져 원경왕후에게 후궁 관할권을 빼앗고 후궁을 더 들인다며 수선을 떨자, 상왕 정종이 "금왕(현임, 즉 재위 중인 왕)은 어찌하여 다시 장가들려고 하시오? 내 비록 아들이 없어도, 정으로 인하여 차마 다시 장가드리 못하는데, 하물며 왕은 아들이 많으니 말해 무엇하겠소? "라고 말해 태종이 거창하게 하려던 가례색을 폐하고 조용히 후궁을 들이기도 했다. 이건 정치에 일절 간섭하지 않던 정종이 유일하게 태종에게 쓴소리 한 것이라고 한다. 후일 정안왕후 김씨가 먼저 사망하자 동생인 태종이 그를 위로하는 잔치를 열었는데, 잔치가 한창 무르익던 도중 갑자기 먼저 간 아내가 떠올라 혼자 즐기지 못하겠다고 잔치를 파하고 돌아간 일화에서 그의 아내에 대한 사랑을 짐작할 수 있다. 허나 아내와의 금술과는 별개로 첩실 소생과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은 상당히 많았다. 지금과 당시의 결혼관이 상당히 다른 면이 있어 그런 것도 있지만, 유교관에서 최고의 불효는 자식을 낳지 않는 것이었고 그렇게 금슬 좋은데 자식을 못 보는 것은 왕비가 불임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효성 또한 대단했다. 태조 이성계의 아들 중 특히나 효심이 깊었던 인물이다. 사료에 의하면 1차 왕자의 난이 벌어질 때는 홀로 병상에 누워 있는 아버지의 쾌유를 비는 제사를 지내고 있었다. 이방원이 난을 일으켰단 소식에 크게 놀라서 김인귀란 자의 집으로 도망갔고 자신이 세자가 되었다는 말에 마지못해서 숨어 있던 곳에서 나온 후 "내가 세자라니! 차라리 정안공(이방원)이 하지? " 라며 발을 빼려다 역시 마지못해 받아들였다. 태조가 "정안공 이방원이 붙인 시위군이 말이 시위군이지 간수나 다름없다" 라며 정종에게 하소연하자 재상을 불러 눈물을 흘리며 설득하여 시위를 풀었다.
이에 태조 역시 눈물을 흘리며 "왕은 성격이 본래 순후하여 이전에도 내 가슴을 아프게 한 적이 없었다."라고 말했다.
또한 2차 왕자의 난에서도, 군사를 일으킨 다음 지지를 바라며 보고하는 이방간에게 "너, 미쳤구나. 당장 군대를 해산하고 궁궐로 혼자 들어오면 내가 목숨만은 지켜주마"라고 하였다. 한 마디로 이방원에게 상대도 되지 않을 테니 정신 나간 짓 하지 말고 얼른 항복하라는 이야기였다. 결국 싸움에서 승리한 정안공이 패배한 방간의 처분을 어찌할지 조언을 구하자 한참을 가만히 있다가 "그래도 어려울 때 기댈 곳은 피붙이박에 없다."며 선처를 당부했다. 결국 방간은 목숨을 건져 유배지에서 그럭저럭 편하게 살다 죽었다. 후술하듯 식읍까지 받았으니 사실상 유배도 아니다. 이후 정종은 왕의 자리를 왕세자로 있던 태종에게 물려주고 본인 역시 상왕으로 물러 앉는다. 상왕의 자리에 앉아 유유자적 세월을 보내다가 이후 세종1년 (1419년)에 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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