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전기 제1대(재위: 1392~1398) 왕
고려 후기 무신이자 조선의 제1대 왕 태조는 재위 1392∼1398. 본관은 전주(全州). 초명은 이성계(李成桂). 처음 자는 중결(仲潔). 호는 송헌(松軒)·송헌 거사(松軒居士)이다. 등극 후에 이름을 이단(李旦), 자를 군진(君晉)으로 고쳤고, 화령부(和寧府: 영흥)에서 태어났다.
이성계는 고려 공민왕 시기부터 급부상한 신흥 무장 세력이었다. 그는 고려의 중앙 귀족 가문 출신이 아니라 원나라의 지배를 받던 쌍성 총 관부 지역에서 힘을 키워가던 변방의 세력이었다. 이성계의 고조부 이안사는 원래 전주 지역의 향리였는데, 집안 식구들을 이끌고 쌍성총관부 지역으로 이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이성계의 가문은 고조부 이안사부터 아버지 이자춘때까지 원나라로부터 천호라는 지방관의 자리를 얻어, 대대로 이 지역 고려인과 여진족 위에 군림하는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고려의 중앙과는 거리가 먼 변경 지역의 세력, 고려의 관리도 아니었던 이성계가 고려의 중앙 조정에 데뷔하게 된 것은 공민왕의 반원 정책 덕택이었다. 중국의 혼란한 국제 정세를 틈타 고려의 자주성을 되찾고자 했던 공민왕은 1356년 원의 간섭기에 잃어버렸던 땅, 쌍성총관부를 수복하려 하였다. 이때 공민왕이 보낸 동북면 병마사 유인우에게 협력하여 쌍성총관부 지역을 고려가 탈환할 수 있도록 도운 사람이 바로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이었다. 당시 20대였던 이성계도 아버지와 함께 원나라 세력을 몰아내는 데 일조하였다. 공민왕은 이자춘의 공을 높이 사 그에게 고려의 벼슬을 내렸으며, 1361년 이자춘은 병마사로 임명되어 동북면 지방의 실력자로 급부상하였다.
이성계는 언제든지 동원할 수 있는 탄탄한 사병 조직을 가지고 있었고, 지역에 뿌리박고 살면서 키운 인맥과 경제력 또한 만만치 않았다. 당시 20대 청년이었던 이성계는 급부상한 집안의 배경과 함께 뛰어난 무예를 겸비하고 있었다.
그는 활을 매우 잘 쏘았으며 동북면의 여진족과 고려인들을 수하로 부리면서 장수로서의 자질을 키워나갔다. 아버지
이자춘의 노력으로 고려의 중앙 무대에 명함을 내민 이성계는 자신의 능력에 힘입어 곧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당시 잇따른 외적의 침입은 약화된 고려 조정으로서는 무척이나 괴로운 일이었지만 청년 이성계에게는 무장으로서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뽐낼 수 있는 하늘이 준 기회였다.
이성계의 본격적인 활동은 1361년 독로강(현재 평안북도 강계지역) 만호 박의의 반란을 진압하면서부터 시작되어, 승승장구를 계속하였다. 그 해 겨울, 압록강이 얼어붙자 중국에서부터 쏟아지듯 침입해온 10만 명의 홍건적들이 수도 개경을 함락시켰다. 이때 이성계는 고려인과 여진족 2000여 명으로 혼합 구성된 자신의 사병 조직을 이끌고 수도 탈환에 참가하였다. 그는 홍건적의 두목과 부하들을 모두 활로 쏘아 죽이고, 개경에 맨 처음 입성하는 큰 공을 세웠다. 이듬해에는 원나라 장수 나하추의 침입을 물리쳤으며, 1364년에는 공민왕을 폐하려는 원나라 황제의 명령으로 침입한 덕흥군과 최유의 1만 군대를 최영과 함께 물리쳐 고려 왕실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이로써 그는 고려 중앙 조정에서 탄탄한 입지를 확보함과 동시에 중요 벼슬을 거치게 되었다.
이성계의 활동은 동북쪽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당시 극심해진 삼남지역의 왜구 침입을 막아내는 데도 혁혁한 공을 세웠다. 특히나 해안뿐만 아니라 내륙에까지 침입하여 약탈을 일삼던 극악한 왜구를 황산에서 섬멸함으로써 그의 명성은 하늘을 찔렀다. 이 전투를 황산대첩이라고 한다. 이후 이성계는 북쪽과 남쪽을 오르내리며 근 20여 년간을 고려 조정을 위해 일했다. 그가 치르는 전투는 모두 승리하였으므로 그는 "불패의 사나이", "난세를 구원할 영웅"으로 명성을 쌓아갔다. 거듭되는 승전은
그를 조정에서 없어서는 안 될 인물로 만들었고, 벼슬길은 승승장구였다.
또한 그의 인기와 명성을 쫓아 많은 사람이 주변에 모여들게 되었다.
하지만, 이성계에게는 변방지역의 출신이라는 꼬리표가 붙어 있었기에,
누대에 걸쳐 뿌리내린 막강 권문세족들이 버티는 고려 중앙정치 무대에서 그의 성장은 한계가 있었다. 특히 같은 시기 이성계와 함께 외적을 퇴치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권문세족 출신의 최영에게는 이성계로서는 넘어서기 어려운 존재감이 있었다. 공민왕 사후 한 때 중앙 정계를 주름잡던 이인임 세력을 최영과 함께 물리친 이성계는 높은 벼슬 자리에까지 올랐지만 언제나 최영의 다음 자리였다. 이때 국제 정세는 명나라가 중국 본토를 차지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었다.
중국 본토를 차지한 명나라는 이웃 나라들과의 관계를 재정립하려 하였다.
명나라가 일방적으로 쌍성 총관부 자리에 철령위를 설치하고 이 지역을 차지하겠다고 통보해 왔다.
최영과 그가 보호하고 있던 우왕은 명나라의 이러한 요구에 반발했다. 그리고 명나라 국초의 불안한 정국을 틈타 요동까지 정벌하자고 나섰다. 이성계는 최영의 의견에 반대했다. 이성계는 최영이 전투의 시기와 국제 정세를 잘못 읽고 있다고 판단하고, 요동정벌이 불가한 4가지 이유를 들었다.
그 이유로는 농번기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이 부적당한 점, 무덥고 비가 많이 오는 시기라 활의 아교가 녹아 무기로 쓰기 힘든 점, 공격 시 남쪽의 왜각 침입할 우려가 있고,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스르는 일을 옳지 않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의견은 최영과 우왕에 의해 무시되었다. 결국 이성계는 우왕과 최영의 명을 받아 우군도통사가 되어 좌군도통사 조민수와 함께 군대를 이끌고 요동정벌 길에 올랐다. 그러나 암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들어가기 전 위화도에 주둔한 이성계는 큰 비를 만나고 더는 앞으로 나갈 수 없는 위기에 봉착하였다. 이대로 물에 빠져 죽을 것인가 군대를 돌릴 것인가의 기로에서 이성계는 조민수를 설득해 회군을 선택했다. 위화도에서 회군하면서 이성계는 이미 왕명을 거역한 반역자의 신세가 되었다. 운명의 기로에 서 있었던 그는 요동정벌을 위해 얻은 대군을 개경으로 끌고 가 쿠데타를 일으켰다.
요동정벌대에 군사 대부분을 내주었던 최영은 적은 숫자로 이성계에게 맞섰지만 역부족이었다. 이성계는 쿠데타에 성공했고 자신을 가로막고 있던 태산과 같은 존재 최영을 제거했다. 이성계는 우왕을 왕위에서 내쫓고 고려 중장 정계의 일인자가 되었다. 이게 그 유명한 1388년에 일어난 위화도 회군이다.
쿠데타의 힘을 실어준 것은 공민왕 시기 중앙 정계로 진출하기 시작한 성리학을 신봉하는 신진사대부들이었다.
당시 신진 사대부는 고려말의 사회적 모순을 고려왕조를 그대로 유지한 채 그 안에서 점진적인 개혁을 추진하려 하였던 온건파와 고려왕조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는 급진파로 나뉘어 있었다. 온건파로는 정몽주, 이색 등이 있었고 급진파로는 정도전이 대표적이었다. 이성계는 정도전과 결탁하여 역성혁명을 반대하고 고려에 대한 충성을 주장하던 정몽주를 마지막으로 제거함으로써 역성혁명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정몽주를 제거하고 4개월 뒤 신진 사대부 세력을 기반으로 1392년 이성계는 마침내 왕위에 올랐으며 이듬해에 나라의 이름을 조선으로 바꾸었다.
새로운 정체성의 나라 조선을 세운 이성계의 재위 기간은 1392~1392년 까지 불과 6년밖에 되지 않는다.
하늘 아래 가장 높은 자리인 왕위에 스스로 오르는 영웅다운 삶을 살아낸 그였지만 말년에 자식들이 벌이는 권력 다툼 앞에서 그는 권력의 무상함을 느끼고 스스로 왕위에서 물러났다.
이후 이성계는 고향인 함경도로 들어가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무학대사의 간곡한 설득으로 겨우 다시 한양으로 들어와 태상왕의 자리에 있다가 창덕궁에서 74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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