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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왕조] 조선의 3대 왕 '태종' 그는 누구인가?

by 치킨다이어터 2021. 3.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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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조선의 2대 왕 '정종' 그는 누구인가?

안녕하세요! 치다입니다. 오늘은 저번 포스팅(조선의 2대 왕)에 이어 3대 왕 '태종'에 대해 포스팅을 해보겠습니다!

태종어전

조선 제3대 왕(재위 1400∼1418).

태조 이성계의 5째 아들 (정안대군)

태조의 아들들이 대개 무인으로 성장했지만 이방원은 어릴 때부터 무예나 격구보다는 학문을 더 좋아했다고 한다. 

1382년(우왕 9년)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383년 문과에 병과 7등으로 급제하였는데 급제하였을 당시 아버지 이성계와 어머니 한씨가 매우 기뻐하였다. 그의 아버지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일으키자 가솔들과 함께 동북면으로 피신했으며, 

아버지를 도와 고려 왕조 유지 세력을 제거하였다. 특히 부하인 조영무와 함께 정몽주 제거 계획을 세운다. 1391년 그의 어머니인 신의왕후 한씨가 사망하자 개성군 상도리에 장사하고 시묘살이를 하였다. 1392년 3월 아버지 이성계가 황주에서 사냥을 하다가 말에서 굴러 떨어져 부상을 당했다. 이성계는 병을 핑계로 은신했는데 어머니 신의왕후 한씨의 상으로 경기도 영평에서 시묘살이 중이던 이방원은 계모 신덕왕후 강씨의 급한 부름으로 개경의 집으로 되돌아왔다. 정몽주는 이성계의 낙마 사건을 계기로 이성계 세력을 축출하고 그간의 개혁 법령을 폐지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이방원은 아버지 이성계에게 정몽주를 제거할 것을 권고하였으나 이성계는 신의를 지키겠다는 마음으로 반대하였다. 이후 이방원은 마지막으로 정몽주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자택으로 불러들여 마주 앉아 시조 한 수를 읊었다. 이때 정몽주와 이방원이 주고받은 시조가 바로 그 유명한 <하여가>와 <단심가> 이다.

좌/이방원 하여가, 우/정몽주 단심가

이방원은 하여가로 서로 사이좋게 지내 새로운 왕조를 창업하는 일에 동참하는 것이 어떠하겠냐는 내용이었다.

정몽주는 이에 단심가로 그의 요청을 거부하였다. 결국 정몽주는 결코 회유할 수 없는 인물이라고 결론을 내린 이방원은 무사를 보내 제거할 것을 지시하였고 결국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타살하였다.

선죽교

정몽주가 죽은 후에 이 자리에서 대나무가 솟았다고 하여 선죽교라 부르게 되었다.

 

 정몽주 등을 제거함으로써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신진 세력의 기반을 굳건하게 하여 새로운 왕조인 조선을 세우는 데 큰 공을 세웠다. 1392년 이성계가 태조로 등극함에 따라 이방원은 정안군에 봉해졌다. 원래 장자로 왕세자를 세워야 하는 것이 원칙이나, 조선 개국에 회의적이었던 태조의 장남인 진안대군 이방우를 제치고 신하들은 가장 유능한 왕자를 세자로 세우라고 주청을 올렸다. 개국의 공로를 따지면 이방원이 태조의 아들 중 가장 많은 공을 세웠으나 정도전은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면 신권을 주장하는 자기들을 제거할까 두려워 결국 왕제자로 태조의 막내아들이자 신덕왕후 강씨 소생인 방석을 선택하였다. 

 

 이방원은 1398년에 태조가 와병 중임을 틈타 개국공신들과 이복동생인 무안대군 방번, 세자 방석 등을 살해하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것을 제1차 왕자의 난이라 한다. 1차 왕자의 난이 있은 후 얼마 안 가 태조는 권력에 대한 회의를 느끼고 영안군 방과에게 보위를 물려주고 함흥으로 떠났다. 왕위를 물려받은 태조의 둘째 아들 방과가 바로 조선의 두 번째 왕 정종이다. 하지만 형제들 간에 다시 한번 분란이 발생하는데 이방원의 넷째 형인 회안대군 방간이 박포의 꼬드김에 넘어가 왕위에 오를 목적으로 1400년에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 이방원은 쉽게 이 난을 진압하고 왕위에 한 걸을 더 다가가게 되었다. 이후 박포 등을 처형하고 방간 부자를 황해도 토산으로 귀양 보냈다. 그리고 그해 11월 정종에게서 양위를 받아 조선 제3대 왕으로 즉위하였다.

 

 태종은 조선 초기의 혼란을 막기 위해 관제 개혁을 통한 왕권 강화, 유교 정치에 온 힘을 쏟았다. 중앙 제도와 지방제도를 새로이 정비하여 고려의 잔재를 완전히 없애고 군사 제도를 정비하여 국방력을 강화했다.

  • 왕권 강화, 국왕 중심의 통치 체제 정비
  • 개국 공신 세력 제거
  • 의정부 설치, 사간원 독립, 신문고 설치
  • 6조 직계제 시행
  • 사병 혁파
  • 양전 사업과 호구 파악, 호패법 실시   / 대표적인 업적

또한 토지 제도와 조세 제도의 정비를 통하여 국가의 재정을 안정시켜 나갔다. 사병 혁파는 정도전 일파 등이 사병을 거느린 것에 위기의식을 느꼈던 것 때문인데 사병 혁파로 고려 이래 각 지역의 실권자들이 개인적으로 거느리는 사병 조직은 사라졌으며 이들은 농부가 되거나 군역에 편입되었다. 태종은 6조 직계제를 통해 의정부와 6조의 관료들이 왕에게 직속되어 정무를 다스리도록 하였다. 그가 이렇게 관료들을 잘 제어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고려 말기에 10년간 과거에 급제하여 관리로 지넀던 적이 있었기에 관료들이 어떤 말을 하고 무슨 행동을 하는지 잘 알았기 때문이다. 태종은 1402년(태종2년) 백성의 억울한 사정을 직접 풀어주기 위해 신문고를 설치하고 수도를 한양으로 다시 옮기는 등 국가 전반에 걸쳐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했다. 주자소를 세워 동활자를 제작했고, 호포를 폐지하고 저화를 발행했다. 태종은 왕권의 안정과 강화를 위해 자신을 등극하게 만들어준 공신들을 유배 보내거나 처형했다. 이러한 태종의 노력이 바탕이 되어 당대와 다음인 세종 때에는 조선이 정치적 안정과 문화적, 군사적 발전을 이루게 될 수 있었다. 

 

 1417년부터 퇴위 직전까지 그는 서운관에 소장된 각정 예언 서적과 무속, 비기도참서를 혹세무민(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미혹하게 하여 속임)의 이유로 소각하도록 지시한다. 태종의 장남 양녕대군은 왕세자인데도 학문 연마를 게을리하고 자유분방한 활동은 좋아했다. 양녕의 스승 계성군은 태종을 찾아와 수업의 불가함을 일렀다. 양녕대군은 각지에 기생들을 궁궐로 데려오기도 했는데 태종은 양녕이 데려온 기생들을 곤장을 쳐서 궁궐 밖으로 내쫓기도 했다.

양녕대군은 그럴 때마다 부왕 태종이 후궁을 많이 거느린 것을 언급하며 항변했다. 1418년 초 태종은 양녕대군이 하루 종일 방탕한 생활만 일삼는다는 이유를 들어 왕세자에서 폐위할 것을 결심한다. 아내인 원경왕후와 상의 끝에 양녕을 폐세자 하기로 하자 신하들은 찬성하였다. 6월, 태종은 양녕을 왕세자에서 폐위하고 셋째 아들인 충녕대군을 왕세자로 삼았다. 이 과정에서 양녕대군 폐위에 반발할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되는 그의 장인 김한로 역시 외지로 유배 보냈다. 

 

 태종은 1418년 8월 10일에 옥새를 충녕에게 넘긴 뒤 수강궁으로 물러났다. 양위를 거두어달라는 청을 거절함으로써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그러나 상왕이 된 후에도 그는 4년간 줄곧 국정을 감독하였고 병권과 인사권을 장악하였다. 1418년 11월 8일 '성덕 신공 상왕'이라는 존호를 받았다. 

 

 1421년 9월 7일 의정부에서 이미 상왕이었던 태종의 휘호를 올릴 것을 청하여 개국의 공을 인정받아 태상왕으로 진봉 되어 9월 12일 '성덕신공태상왕'으로 존숭 되었다. 7개월 후인 1422년 4월, 날씨도 화창하여 세종과 함께 철원의 고석정 근처에서 사냥을 하여 노루, 멧돼지를 한 마리씩 잡았고 또 22일에는 다시 세종과 동교에서 매사냥을 하다가 낙천정에서 쉬기도 하였는데 이날 태종은 환궁하였다가 자리에 눕게 되었다. 그리고 보름이 넘게 병석에 있다가 56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자 오늘은 태종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이 태종(이방원)은 육룡이 나르샤에서 유아인 배우님이 연기를 해서 아주 인상 깊게 본 적이 있는데요 이렇게 자세한 내막을 살펴보니 생각보다 위대한 업적을 많이 세운 왕이었네요. 

다음에는 또 다른 알찬 포스팅으로 돌아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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