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

[조선왕조] 조선의 14대 왕 '선조' 그는 누구인가? [上]

by 치킨다이어터 2021. 5. 14.
728x90

안녕하세요! 치다입니다 : ) 오늘은 임진왜란을 아시는 분들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왕 '선조'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조선 제14대 왕(재위 1567∼1608).

선조 어진 - 윤탁연이 임진왜란 초기 입수하여 소장하여 대대손손 물려줌

< 선조 즉위 >

 

명종이 죽고 16세의 하성군(선조)이 왕으로 즉위하였다. 조선 최초로 후궁의 자손이 왕이 된 상황이었다. 이렇다 보니 왕이 서얼 출신의 딱지 붙었고, 왕의 권위는 한층 더 떨어졌다. 물론 조선 27명의 임금 중 후궁의 자녀가 왕이 된 경우는 많지만 선조 이전엔 모두 왕과 왕비 사이의 왕자가 왕위에 올랐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명종은, 훗날 선조가 된 하성군과 그 형제들을 부른 적이 있었다. 그리고 왕이 쓰는 익선관을 친히 벗어 써보라고 하는데, 하성군의 두 형은 차례대로 익선관은 써봤지만 막내 하성군은 쓰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명종이 "너는 왜 익선관을 쓰지 않는 것이냐?"라고 물으니 하성군이 말하길, 임금님이 쓰시는 것을 어찌 감히 신하가 쓸 수 있겠습니까?라고 답하였다. 형들에 비해서도 기지가 남달랐던 그였었다. 선조는 조선 27명의 임금 중 즉위 기간이 4번째로 긴 왕인데, 긴 세월 동안 많은 사건이 일어났다. 그중에서도 정치적으로 아주 중요한 사건이 일어나는데, 바로 사림 시대가 시작된 것과 붕당이 발생한 것이었다.


< 사림의 시대 >

 

사림은 지방에서 중앙으로 등용되어 올라온 원리원칙주의자 성리학자들 이었다. 즉위 초부터 학문에 정진하며 성리학적 왕도정치를 신봉하게 된 선조는 정계에서 훈구, 척신 세력을 모조리 밀어내고 사림의 명사들을 대거 등용하였다. 특히 성리학의 거두 이황과 이이를 나라의 스승으로 여겨 극진히 대우하였다. 네 번의 사화를 겪으며 몰살당했던 사림 학자들이 재기에 성공하고, 그중에서도 이황, 이이, 조식, 성혼을 중심으로 학파가 결성되었다. 이에 따라 학문이 더 발전함과 동시에 정치적 논쟁도 치열해졌다.

 

< 동인과 서인 >

 

얼마 후 사림 세력은 정치, 학문적 입장이 달라 둘로 나뉘는데, 맨 처음엔 '이조전랑'이라는 관직 때문에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었다. 이조전랑은 조선시대 6조 중 하나의 이조의 관직 이름인데, 비록 높은 관직은 아니었지만 인사권이라는 메리트를 갖고 있었다. 그래서 이 자리를 누구나 탐내던 차에 김효원과 심의겸이라는 두 사람이 한판 붙게 되는데, 결국 젊고 장원 급제 출신에, 인기도 많은 김효원이 이조의 정랑이 되었다. 그런데 이때 심의겸이 그가 옛날에 윤원형에게 얹혀살던 자라며 권력 대신 집에 더부살이하던 자가 행실이 올바르겠냐고 비꼬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효원은 이조정랑으로 임명되었으나 이후에도 두 사람의 갈등은 끝나지 않았다. 김효원의 후임으로 심의겸의 동생이 거론되자 괘씸한 맘을 갖고 있던 김효원이 그는 선왕의 외척이라 중요 업무를 못 맡긴다며 다른 사람을 추천해버렸다. 결국 김효원과 심의겸의 신경전은 더 날카로워졌고 이들을 중심으로 사림 세력이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게 되었다. 동인과 서인은 어떻게 나오게 되었을까? 김효원이 사는 곳이 서울 동쪽 건청동이라 '동인' 심의겸이 서울 서쪽인 정동이라 '서인'이라고 하였다. 동인은 1589년 정여립의 모반사건으로 인하여 남인과 북인으로 한번 더 분열하게 된다.

 

 

 

< 정여립의 모반사건 >

 

과거 급제 출신인 정여립은 오늘날 외교부와 교육부의 기능을 하는 예조좌랑이 되었는데, 그는 서인인 율곡 이이의 문하생이기도 하였고 초기 관직 생활도 서인들과 함께하던 자였다. 하지만 이후 당시 정권을 장악하던 동인 편에 들어가더니 서인에 있는 이이와 성혼 등을 비판하기 시작하였다. 서인 입장에서는 기가 막힐 따름이였다. 박쥐 같은 정여립에게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왕에게 글을 올려 비판하는 사람까지 등장하였다. 정여립은 동인을 지지했음에도, 결국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고향에서 대동계라는 모반 단체를 조직해서 사람들과 군사훈련을 하며 세력을 모으는데, 이런 정여립의 활동은 결국 그의 발목을 잡고 말았다. 1589년 왕에게 상소 하나가 날아왔다. "정여립이 한강이 얼면 한양으로 쳐들어와 신립과 조정의 신하들을 죽이고 어명을 위조하여 죽일 것이라는 역모를 꾀하고 있다고 합니다" 정여립의 역모 소식에 권력을 잡고 있던 동인들이 당황하였다. 당시 정여립은 동인 소속이라, 동인들은 정여립의 결백을 주장해왔기 때문이다. 놀란 조정은 정여립을 급히 잡아 오게 했으나 정여립은 같이 간 변숭복과 아들을 죽이고 자신도 칼을 거꾸로 세워 자살하였다. 

결국 정여립이 진짜 역모를 꾸민 것인지에 대한 진실은 미궁에 빠지게 되었다. 이것이 정여립의 모반사건이다.

 

< 16세기 말, 조선 >

 

조선은 건국 후 200년 동안 직접적으로 전쟁이 터진 적이 없었다. 이 시기 일본에서는 100년간의 전국시대가 펼쳐져

치열하게 서로 군사력을 키우는 전쟁 중에 있었다. 게다가 이때 일본은 조선과는 다르게 서양과 교역을 활발히 했고 이에 따라 조총과 같은 신무기도 본격적으로 도입되었다. 오다 노부나가와 그의 부하였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이 조총으로 일본 전국시대를 통일하게 되는데, 오다 노부나가가 죽고 그를 계승해 도요토미가 일본의 전국을 통일하였다. 이제 일본엔 100년간의 전쟁이 끝나고 평화의 시기가 왔고, 도요토미는 이제 나라 밖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하였다. 사실 그는 애당초 조선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조선을 발판 삼아 만주를 침공하려 하는데, 명나라를 공격하고자 하니 조선은 길을 빌려줘야 한다는 일본의 말을 조선은 당연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하지만 일본은 끝없이 통신사 파견을 요구하였다.

결국 조선이 동인의 김성일과 서인의 황윤길을 일본에 통신사로 파견하였다. 그 둘은 1년 뒤 선조에게 도요토미를 만난 일을 보고하였는데, 문제는 김성일과 황윤길이 서로 상반된 보고를 했다는 것이다. 서인 황윤길은 왜국이 전쟁 준비에 한창이니 그들의 침략을 대비해야 한다고 하였고, 동인 김성일은 도요토미가 인물도 보잘것없고 군사 준비가 있음을 보지 못했기에 전쟁에 대비하는 건 민심만 혼란스럽게 할 뿐이라고 하였다. 이런 의견 대립은 서인과 동인의 정치 대결로 이어졌고 결국 동인 김성일의 주장이 채택되는데, 이유는 막대한 예산을 들여 전쟁 준비를 했다가, 전쟁이 안 날 경우 세금만 왕창 낭비했다고 비난받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조선은 전쟁 준비를 소홀히 하게 된다. 나중에 김성일은 이 일에 대한 죄를 씻기 위해 임진왜란 중 의병을 일으켜 의병장으로 활약하기도 하였다. 한편 전란 대비를 안 하던 조선에서 유일하게 전쟁 준비를 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충무공 이순신이었다. 

 

 

 

오늘은 여기서 [조선왕조] 조선의 14대 왕 '선조' 그는 누구인가? [上] 편을 마치고 다음 포스팅에 국민 영웅 이순신에 관한 이야기부터 쭉 써보겠습니다 : ) 

[조선왕조] 조선의 13대 왕 '명종' 그는 누구인가?

 

[조선왕조] 조선의 13대 왕 '명종' 그는 누구인가?

안녕하세요! 치다입니다! 오늘은 조선의 제13대 왕 명종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 ) 조선 제13대 왕(재위 1545∼1567). < 을사사화 >  1545년, 인종이 재위 약 9개월 만에 죽어버리고 12세 경원대군이

keyw0rdmaster.tistory.com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