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 ) 치다입니다~! 오늘은 조선시대 최악의 폭군 연산군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조선 제10대의 왕(재위 1494∼1506).
< 연산군의 어린 시절 >
연산군은 조선 역사상 손에 꼽히는 악행과 살육을 저지른 임금이다. 연산군이 폭군이 된 이유는 고독한 어린 시절에서 출발한 것일지도 모른다. 연산의 할머니인 인수대비는, 본인 손으로 쫓아낸 며느리의 아들을 혹독하게 대하고 다른 손자와 차별하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천륜은 못 속이는 법인지, 연산은 친어머니가 아니었던 새 왕후를 별로 따르지 않았다고 한다. 연산은 이렇게 가슴에 응어리를 안고 성장해 갔다. 그는 어릴 때부터 학문을 싫어했고 독단적인 면을 보였다. 세자에 관한 야사 중에는 아버지 성종이 아끼던 사슴을 활로 쏴 죽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의 내면에 있던 광폭한 성격은, 왕이 된 후 본격적으로 표출되었다. 그는 자신을 비판하는 사람을 단 한 명도 곁에 두지 않는 전형적인 독재 군주로 군림하게 된다.
< 성군의 기질이 보였다 >
많은 사람들이, 친어머니가 사약을 받은 걸 알게 된 후로 연산군이 갑자기 미쳤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사실 연산은 즉위 초부터 어머니의 사건을 알게 된다. 즉위 초기에 아버지 성종의 묘지문을 보면서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기 때문이다. 친어머니의 존재를 알게 된 연산이었지만 일단 복수의 칼날은 마음속 깊숙이 숨겨두었다. 적어도 즉위 초기의 연산군은 폭군이 아니었다. 이때는 그래도 성종 때의 평화로운 분위기가 이어졌고 인재가 넘쳐나 민간의 질서가 유지되고 있었다. 오히려 성종 말기의 부패와 퇴폐 풍조를 바로잡기까지 하였다. 왕위에 오른 지 6개월 후, 전국에 암행어사를 파견해서 민간을 살피고 관료들의 기강도 바로 잡았다. 또한 여진족의 침략이 이어지던 변방에 안정을 꾀하기도 하였다. 성군의 기질까지 보이는 듯했던 연산군의 첫 4년 하지만 이 기간에 그는 사림파와 신경전을 벌이게 된다.
< 사림파의 몰락 >
도의를 중시하는 사림파가 학문을 강요하고 사사건건 옳은 말을 했던 것이였다. 원래부터 학문에 뜻이 없는 데다, 왕권 강화를 원했던 연산군은 입바른 소리를 하는 사림파 신하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첫 번째 피바람이 불어오니 1498년 무오년의 이른바 '무오사화' 였다. 조선 시대에는 총 4번의 사화가 일어나는데, 사화는 조선 신진세력인 '사림파'가 보수세력 '훈구파'에 의해 목숨을 잃은 사건을 말한다. 연산군 때에 총 2번의 사화가 터졌다. 첫 번째 사화인 '무오사화'는 사초 때문에 터지게 된다. 사초는 실록을 만들기 위해 쓰이는 역사 기록인데 사초 중에서도 사림파 대표 '김종직'이 쓴'조의제문'이 문제가 되었다. 조의제문은 중국의 항우와 의제의 이야기를 빗대서 세조가 조카 단종을 쫓아낸 일을 비판한 글이었다. 이 글을 쓰고 김종직이 죽었는데 그의 제자가 성종실록을 만들 때 이 글을 실었던 것이다. 이것을 훈구파 대신이 발견했고, 결국 연산군에게 전해졌다. 이때다 싶었던 연산군은 사림파 관료들을 죽이거나, 귀양을 보냈고 조의제문을 쓴 당사자인 김종직은 관을 절단하여 시신을 다시 베어 죽이는 '부관참시'를 당하였다. 이제 사림이 제거됐으니, 그에게 학문을 권하거나 충언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저 간신들만 득실 될 뿐이었다.
< 기녀 장녹수 >
이렇게 조정을 장악한 연산군은 향락과 패륜을 일삼았다. 궁궐에선 매일 연회가 열렸고, 전국에서 뽑은 수백 명의 기생들이 동원되었다. 특히 재주와 미모가 뛰어난 기생을 '흥청'이라 불렀는데, 기생들과 맘껏 놀고 사치를 부리다 결국 국고가 바닥나버리고 만다. 여기서 맘껏 떠들고 논다는 '흥청망청'이란 말이 유래되었다. 또한 연산군 스토리에서 빠질 수 없는 여인은 장녹수 인데, 연산군은 어질고 현명한 중전보다 장녹수를 더 아꼈다. 의외로 장녹수는 뛰어난 미인이 아니었다
실제로 실록에선 장녹수의 얼굴을 지극히 평범하다고 기록하였다. 장녹수를 너무 사랑한 연산군은 화가 나있다가도 장녹수를 보면 바로 미소를 지을 정도로 사랑에 빠져있었다. 한 기녀는 장녹수의 치마를 밟은 죄로 참형을 당하였다고 한다.
< 또 다시 피바람이 불다 >
연산군은 노느라 바닥난 국개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백성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물렸고, 공신들에게 지급한 공신전과 노비까지 몰수하려 하였다. 그러자 보다 못한 조정 대신들이 반발하여 제발 연회 좀 줄이자고 간청했다. 연산군은 즉위 초 폐비 윤씨 이야기를 알게 됐을 때도 가만히 있었다. 하지만 신하들이 왕권에 도전할 때마다, 친어머니를 죽음에 내몰고 방관한 자들까지 다 처단하겠다고 다짐한다. 이때 정권 장악을 꿈꾸던 기회주의자 임사홍이 연산군에게 폐비 윤씨 사건을 들춰낸다. 연산군은 원래 친어머니 사건을 알고 있었으나 이제 자세한 내막까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1504년
조정에 대살생극이 벌어졌다. 이것이 갑자년에 일어난 '갑자사화'였다. 연산군은 어머니의 죽음 당시 언론 활동을 했던 사림파 학자들을 죽여 나갔다.
어머니의 죽음에 앞장섰던 두 후궁, 즉 그의 의붓어머니들을 궁중의 뜰에서 직접 참했고, 어머니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할머니 인수대비를 머리로 들이받아 죽게 만들었다. 연산군은 손에 피를 묻혀가면서, 어머니를 제안왕후로 추승하였다. 이로써 폐비 윤씨는 아들을 통해 잠깐이나마 왕후의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겉으로 보면, 폐비윤씨의 원한을 갚기 위한 복수의 살육 사건 같은데 사실 연산군과 임사홍 일파가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머리를 쓴 고의적인 참살극이었다.
7개월 동안 관련자들을 모조리 죽이고 모든 권력을 손에 쥔 연산군은 문신들의 귀찮은 잔소리가 들려오는 경연이나 사간원, 홍문관 등을 없애버리고 상소나 여론과 관련된 제도를 죄다 철폐해버린다. 게다가 유교 국가에선 상상도 못 할 행동을 하였다. 학문을 연구하는 성균관 대성전을 동물 사냥을 위한 동물원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었다.
< 폭군의 최후 >
폭주하는 연산군의 행보를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된 신하들이 1506년, 군사를 일으켜 연산군을 폐위시키고 성종의 둘째 아들 진성대군을 왕으로 추대 하였다. 결국 강화도로 유배된 연산군은 2개월 뒤 31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그의 마지막 유언은 뜻밖의 것이었다. 죽을 때 다른 말은 없었고 다만 신씨(연산군 아내)를 보고 싶다 하였다.
결국 미친 듯이 폭주하던 연산군은 결국 조선왕조 최초로 신하들에 의해 쫓겨난 임금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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