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치다입니다 : ) 오늘은 9대 왕 성종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조선 전기 제9대(재위:1469~1494) 왕.
본관은 전주 이름은 이혈 세조의 손자이고, 덕종의 둘째아들이다. 어린 나이에 즉위한 그는, 스무 살이 될 때까지 할머니 정희왕후의 섭정을 받았다. 그는 모든 기초를 완성시켰다는 의미의 '성종'이라는 묘호를 얻을 만큼, 조선 개국 이래 최고의 태평성대를 열었다. 어린 성종은 할머니의 보필 아래서 제2의 세종대왕을 목표를 유학 공부를 열심히 하였다. 외촌 6촌 이내에는 결혼을 하지 못하도록 금지하고 불교 제도인 화장 풍습을 없앴으며 사대부와 평민의 제사에 차별을 두어 4대 명절에 이를 검사하고 삼강행실을 의무적으로 강습하게 하는 등, 유교문화를 강화해 나갔다. 정희왕후의 유교 문화 강화책과 민생 안정책은 당시 영의정이었던 신숙주와 한명회가 주도했는데, 이 때문에 자연스레 정치는 신권 중심으로 흘러가게 되었다. 하지만 정희왕후의 수렴청정이 끝나고, 성종이 편전을 장악하면서 조정의 분위기가 급격히 변해 갔다.
성종은 먼저 조정의 서무결재에 원로대신들이 참여하던 원상 제도를 없애서 왕명 출납과 서무 결재권을 되찾았다. 성종은 할아버지 세조가 없애놓은 것들을 다시 부활시켰는데, 먼저 왕과 신하가 공부하는 '경연'제도를 다시 만들었다. 모범 임금인 성종은 왕이 된 후로, 거의 매일 경연에 참여했는데, 그 횟수는 25년 재위 기간 동안 9229회였다. 또한 오늘로 치자면 대통령 자문기구이자 조교 집단인 연구실을 따로 차리는데 이것이 바로 '홍문관'이었다. 이후 독서당도 설치하고,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줘서 독서 저술에 집중할 수 있도록 했다. 이런 정책은 서적 편찬 사업을 융성하게 하였는데 그 결과로 '동국여지승람'과 '동국통감'등 여러 서적이 쏟아져 나왔다. 성종은 세조가 없앴던 유향소도 다시 부활시켰다. (유향소는 지방 사또를 보좌하고 감시하는 지방자치기구이다.) 성종 시절, 중앙으로 진출한 세력가들이 유향소를 통해 지방에서도 주도권을 잡을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중앙으로 진출한 세력을 신진 세력이라고 했는데 성종 시절의 신진 세력은 '사림파'였다. 원래 집권 세력은 '훈구파'였는데 훈구파는 세조 시대의 공신들이 중심으로 모인 세력이었다.
성종은 훈구파에게만 힘이 쏠리지 않도록 지방에서 성리학을 연구하던 뉴페이스 '사림파'를 뽑았다. 특히 사림파의 거두인 '김종직'의 학식과 문장이 뛰어난 것을 알고 있던 성종은, 수렴청정에서 벗어난 후 그를 중앙에 불러 들였다. 중앙 정계에 진출한 '김종직' 등의 성리학자들은 당시 언론 3사를 꿰차고선 훈구파를 격렬하게 비판하였고, 이로써 자연스럽게 두 세력의 힘이 균형을 이루게 되고 그 사이에서 성종은 왕권을 굳건히 다졌다. 조선 중기 정계의 가장 큰 변화는 이렇듯 중앙 정계에 사림파가 진출한 일이었다. 세종을 멘토로 삼은 성종은, 세종의 업적을 많이 따르려 했는데 특히 세종처럼 성종도 음악으로 백성을 교화시키려 하였다. 인간 완성 최고의 방법을 예술이라 했던 공자의 말대로 조선시대 유학에선 음악을 중시했다. 그 결과 성종은 '악학궤범'이라는 음악 백과사전을 만들었다. 성종의 업적 중 딱 한가지만 기억해야 한다면, 그것은 '경국대전'의 완성이다. 그만큼 중요한 일이었다.
성종의 할아버지인 세조 때부터 만들어진 경국대전이 손자인 성종 때에 완성되어 반포하게 되었다.
경국대전은 중국의 영향을 받지 않은 우리만의 고유 법전이었다. 이것의 완성으로 이제 조선은 그때그때 되는대로 일을 처리하는 게 아니라, 모든 것이 법에 기반하여 체계적인 국가 제도를 잡을 수 있게 되었다. 한편 조선 초부터 야인들이 변방을 위협해왔는데, 성종은 이들을 완전히 소탕해서 변방까지 안정시켰다. 그 결과 성종은 조선왕조의 전반적인 체제를 완성시켰고, 성종의 백성들은 건국 이래 가장 태평성대한 세월을 맞이하였다. 하지만 이런 태평성대의 이면에서 사회적 퇴폐 풍조가 생겨나기도 헀는데, 성종이 후기에 들어 유흥에 빠지고, 이것이 확산되면서 사회 전반에 유흥을 즐기는 분위기가 만연 하게 되었다. 야사에 등장하는 어우동 스토리도 이 시기에 만들어졌는데, 어우동 야사에 성종이 어우동과 어울렸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성종에게는 9명의 후궁이 있었는데, 후사를 잇는 것도 왕의 의무이니, 왕의 여인들은 새로운 후궁이 들어온다 해도 부글거리는 속을 참으며 자애로운 미소를 보여야만 했다. 그러나 가끔은 인내심이 한계를 넘어 폭발하는 아내들이 있었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성종의 아내이자 연산군의 어머니인 '폐비 윤씨' 였다. 원래 윤씨는 예의 바르고 검소해서 성종 어머니인 소혜왕후의 예쁨을 받았는데, 시어머니에게 늘 살갑게 대하고 다른 후궁들과도 잘 지내는 모습을 보였었다. 게다가 성종의 아이까지 가졌는데 이 아이가 바로 연산군이다. 윤씨는 이렇게 중전의 자리를 꿰찼다. 하지만 윤씨는 중전이 되자 본색을 드러냈다. 성종의 또 다른 여자들에 대한 질투를 참을 수 없던 것이었다. 윤씨는 성종이 총애하는 후궁들을 죽이겠다며 독을 갖고 다니다 발각됐으나, 성종의 선처로 무마되는 일이 있기도 하였다. 게다가 야사인'소문쇄록'에 의하면 성종이 규방에 지속적으로 출입하고 자신을 멀리한다며 왕의 얼굴을 할퀴어 버린 사건도 전해지고 있다. 얼굴에 손톱자국이 나니, 왕의 체면은 말이 아니었고 성종과, 성종의 어머니 인수대비가 크게 분노하였다. 그래서 중전이 된 지 3년 만에, 윤씨는 폐서인이 되었다. 그런데 조정에서는 장차 왕이 될 세자의 친모를 백성처럼 살게 해선 안 된다는 상소가 이어졌고, 이에 세자가 커가면서 조금씩 폐비 윤씨에게 동정심을 갖고 있던 성종이 내시와 궁녀들에게 그녀를 살펴보고 오라고 명 하였다. 하지만 인수대비는 뒤에서 이 상황을 조종하고 있었고, 결국 인수대비의 명을 받은 신하들은 성종에게 폐비 윤씨가 전혀 반성하지 않는다는 허위 보고를 하였다. 이 보고를 받은 성종은 결국 윤씨에게 사약을 내렸다. 사사한 후 폐비 윤씨는 묘비도 못 세우고 동대문 밖에 버려지다시피 했는데, 그래도 성종은 세자의 앞날을 고려해 '윤씨지묘'라는 묘비명을 내리긴 하였다. 이때 폐비 윤씨의 아들 연산의 나이는 고작 6살이었기 때문에 그저 새로 들어온 중전이 자신의 어머니인 줄 알고 자랐다. 폐비 윤씨 사건이 훗날 조선을 뒤흔든 살생극의 원인이 될 줄 아무도 몰랐다. 이후 성종은 1494년, 38세에 나이로 생을 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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