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조선의 10대 왕 '연산군' 그는 누구인가?
안녕하세요 치다입니다 ~ : ) 오늘은 폭군 연산군을 몰아내고 왕이 된 중종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조선 제11대 왕(재위 1506∼1544).
중종(진성대군)은 연산군의 이복동생이었다. 연산군이 폭정으로 반정세력에 의해 축출을 당하고 겨우 목숨만 부지하던 19세의 왕자 진성대군이 하루아침에 왕으로 즉위하니, 그가 곧 조선 제11대 왕 중종이다. 연산군과 궁중 세력의 12년 독재가 끝나자 이제 정치의 주도권은 훈구세력에게 돌아갔다. 이것은 곧 조선의 정치가 성종 이전으로 되돌아 간 것을 뜻 하였다. 중종은 단 한 번도 왕세자 수업을 정식으로 받은 적이 없었다. 그는 정통성에 의한 왕이 아니라 신하들에게 떠밀려 왕이 된 것이었는데, 이것은 곧 반정공신들에게 휘둘려야 하는 운명을 뜻 하는 말이었다. 게다가 중종은 공신들의 반대로 조강지처까지 버려야 했다. 중종의 아내 단경왕후의 아버지가 연산군의 처남이었기 때문이었다. 중종은 단경왕후 신씨가 쫓겨나자마자 새 왕비를 들이긴 하였는데, <국조기사>에 따르면 조강지처 신씨와 중종의 애정이 매우 두터웠다고 전해진다. 중종은 그녀가 그리울 때마다 높은 누각에 올라가, 그녀의 본가 쪽을 바라봤다고 한다. 신씨의 집에선 이 사실을 전해 듣고는 집 뒷동산 바위 위에 신시가 자주 입던 분홍색 치마를 펼쳐놨었다. 이것이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온 인왕산 치마바위의 전설이다. 이런 치마바위의 전설을 남긴 신씨는 자식도 없이 홀로 평생을 외롭게 살다가 71세에 세상을 뜨게 된다. 단경왕후 신씨가 폐위된 후 왕비에 책봉된 장경왕후 윤씨는 세자 인종을 낳은 후 산후병을 앓아 25세에 죽게 된다. 중종은 왕으로 등극한 뒤 연산군의 폐정으로 문란해진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고 정치 수준을 끌어올리려 하였다. 그래서 왕의 자문을 담당하던 홍문관 기능을 강화하고 경연으로 정책을 위한 논쟁도 열심히 해나갔다. 중종은 이런 정책들로 왕도정치를 앞세우고 싶었지만 반정에 성공한 공신 세력이 너무 세서 왕의 입지는 미약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상황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영의정 박원종이 죽고선 공신 세력의 위세가 약해졌고 반정 이후 사회에 개혁적인 분위기가 확산되면서 정치도 새로워져야 한다는 여론이 생겨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개혁에 대한 목소리는 주로 갑자사화로 정치 일선에서 밀린 사림에서 나오곤 했는데, 당시 사림의 대표적인 인물은 바로 조광조였다. 이제 공신 세력의 손에서 벗어나 포부를 펼치고 싶은 중종이 1515년, 자신을 보필할 인물로 조광조를 선택하게 된다. 엄격한 도학 사상가였던 조광조를 정치 일선에 끌어들여 도학적 사상에 뿌리를 둔 군주정치를 펼치고 조정을 장악하던 공신 세력을 견제하기 시작하는데, 조광조는 한 마디로 급진적인 개혁가였다. 신념이 강한 그는 한 번 정한 뜻을 절대 굽히지 않았다. 훈구파는 상대적으로 다른 문화나 종교에 개방적이었으나 사림파는 성리학 외 학문을 이단이라며 배척하였다. 그래서 불교와 도교를 모두 억압하였다. 민간에 유교적 도덕관을 심어야 한다는 조광조의 주장으로 중종이 전국적으로 여씨향약을 실시하는데, 여씨향약은 유교사상을 기반으로 한 민간 자치 규율이었다. 1518년, 조광조는 과거제가 인재 등용에 한계가 있다며 천거를 통해 인재를 등용하자는 파격적인 제안을 한다. 조선의 과거시험은 오늘날의 수능과 같았는데, 학문을 깊게 알아도 시험을 잘 못 보면 소용이 없었다. 조선 과거제에서도 시험을 잘 보기 위한 기술이 필요했고, 요즘처럼 과거시험 전용 족집게 과외 선생님이 존재하였다. 그래서 과거는 주로 중앙 훈구대신들의 자녀들이 많이 합격하곤 했는데, 이를 해결하기 위해 품성이 좋은 사람을 추천받아 모으고 그들을 대상으로 시험을 치른 뒤 관리로 등용하자는 것이었다. 이런 제안을 중종이 받아들이니, 이것이 바로 현량과이다. 그래서 추천을 받은 28명이 요직에 배치되었는데 그중 대부분은 사림파 학자들이었다. 이것은 사림파 중심의 이상 정치를 위한 것이었다. 이들은 언론기구인 삼사에서 근무하며 여론을 장악해갔다. 조광조 일파의 개혁 정책은 아주 급진적이고 과격해서 훈구파의 엄청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게다가 조광조는 도학적 정치이념을 내세우면서 중종을 밤새 공부시키고 끝없이 학문을 닦으라고 하였다. 처음에 중종은 왕세자 교육도 못 받았던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진정으로 인정받는 임금이 되기 위해 노력했지만 지속되는 압박으로 결국 중종은 조광조에게 질리고 만다. 중종의 마음을 파악한 훈구파가 상소를 올려 조광조 일파가 임금을 속여 국정을 어지럽힌다 주장하자 중종이 이 상소를 받아들이고 신진 사림 세력을 숙청하였다. 이것이 기묘사화이다.
개혁을 꿈꾸던 젊은 학자 조광조는 사약을 마시기 전 이러한 시를 썼다.
재위 기간이 38년이나 되어도, 후손들이 중종보다 조광조를 더 기억한다는 것은 조광조의 업적이 중종의 것 보다 위대하다는 것일 텐데, 조광조의 너무 급진적인 성향이 부작용을 낳게 된 것이다. 조광조의 죽음과 함께, 중종의 개혁 의지도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이후 기세 등등해진 훈구파가 권세를 쥐고 흔들면서 중종 중반기 이후엔 정치적 혼란이 계속되었다. 기묘사화의 여파로 1521년 신사무옥이 일어나면서 사림파가 다시 숙청되고 숙청됐던 신하가 정계에 복귀했다 파직되는 등 각종 혼란의 도가니에 빠져있던 조선이었다. 이런 난장판은 국방 정책에도 혼란을 주게 되는데, 성종과 연산군 대에만 해도 비교적 잠잠했던 왜구들이 대마도의 지원을 받아 세력을 넓혀 가는데, 부산포와 내이포, 염포 등의 삼포에서 거주하던 왜인들이 기어코 폭동을 일으키니, 이것이 삼포왜란이다. 이 때문에 경상도 해안 일대가 엄청난 피해를 입고 조선과 일본의 통교가 중단되었다. 일본의 아시카가 막부의 간청으로 1512년 임신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임신조약 후 조선은 대마도에서 보내던 무역선 '세견선'과 그에 대한 응답으로 조선에서 보내던 세사미두를 반감한다. 세사미두는 해마다 대마도주에게 하사하던 쌀과 콩이었다. 더불어 왜인들이 삼포에서 거주하는 것을 금지하고 왜인들의 출입을 엄격하게 제한하는데, 이런 엄격한 통제에도 불구하고 왜인들의 변란은 자주 일어났다. 북방에서는 야인들의 침략이 빈번하게 발생하여 피살 사건 등의 분쟁이 끊이질 않았다. 남쪽에선 왜구가, 북방에선 야인이 극성을 떠니, 조정은 왕권 호위를 강화하기 위해 정로위를 설치하고 왜구에 대응하기 위해 비변사를 설치한다. 조광조 개혁 정치의 여파가 여전히 남아있어서 사회에선 유교주의적 도덕 윤리가 정착되어 가는데, 의복이나 혼인과 관련된 사치를 금지하면서 민생 안정을 위해 노력하기도 하고 각 방면으로 진흥 정책을 추진해보지만 정치 혼란과 국방의 불안으로 딱히 효과를 거두진 못하였다. 이렇게 중종의 개혁 정치가 실패한 원인을 두 가지로 뽑아 보자면 첫째, 인재를 활용할 줄 모른다는 것과 둘째, 뚜렷한 정치철학이 없다는 것이 원인이었다. 조광조 같은 급진개혁파를 등용하여 빠른 시간에 사회 개혁과 정치 혁신을 이루려 했으나, 당시 상황에서는 무리한 일이었다. 개혁이 급진되려면 왕 스스로가 뚜렷한 방향성을 가지고 있어야 했는데 왕은 조광조를 따라가기 급급했고 결국 조광조를 제거하기에 이르렀다. 38년 3개월이라는 긴 시간, 왕위에 올랐던 중종은 1544년 세자에게 왕위를 넘겨준 다음 날 57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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